영적 경험은 자신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독특하고 신기한 영적 증거들을 들을 때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나도 저런 경험을 해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맛볼 수 있을까 하여 그 사람이 행한 대로 행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해서 그런 능력과 경험을 얻었다면 자신도 40일 금식을 해서라도 그런 능력을 얻고 싶어 합니다. 7~80년대 우리 교회는 이런 것이 유행처럼 번져갔습니다. 40일 금식기도는 사역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것처럼 한 때 유행이 되었지요.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여러 차례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경험과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인데 오늘날에는 그 당시처럼 유행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듯이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적 경험은 좀처럼 주시지 않습니다. 특히 신묘한 경험들은 우리가 함부로 해석하여 스스로를 망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영적 현상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또는 장차 주어질 직임에 필요한 내용들과 관련된 것들을 부분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꿈과 환상과 예언은 주로 자신을 인도하고 성숙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꿈에 타인이 등장해도 그 상징은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사람과 동일한 성향이나 기질 등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꿈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꿈을 꾸면 그 사람에게 해당하는 꿈이라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영적 경험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주십니다. 아무리 신묘한 경험이라고 해도 우선은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히 그 경험이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언적 경험이었다면 그 사실을 알려주시는 다음의 조치가 있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주시는 특별한 경험은 성숙한 지도자들이나 예언자들이거나 사역자에게 해당합니다. 초보자에게는 그런 부담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꿈과 환상은 상징을 동원하며, 많은 위험이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특히 예언은 예언자가 미숙하면 실수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지요. 미숙한 사람은 ‘가정’이라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게시판 글에서 이미 다룬 내용이지만 우리는 늘 자신의 지식수준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요. 그래서 주어진 경험을 자신의 신앙 수준에서 이해하고 전하려는 충동을 받게 됩니다.
근래에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신앙의 연륜도 깊지 않고 다양한 영적 경험도 없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천국에 들려 올라가 천국을 보고 그곳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 경험의 진정성에 대해서 한 번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간증에서 우리는 짙은 ‘가정’(assumption)을 보게 됩니다. 천국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말에서 우러나오는 그 사람의 신앙의 연륜과 지식의 정도를 확연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초보 신앙인의 경우 초보적인 신앙관으로 그 일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보았다고 하는 내용들이 거의 비슷합니다. 릭 조이너와 같은 선지자에 속한 사람의 경험은 그 내용이 그런 사람들과는 여러 모로 다름을 봅니다. 영적 경험은 그 수단을 떠나서 그 내용이 어떠한지는 그 사람이 지닌 영적 지식에 의해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현상들을 경험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적 지식의 폭을 넓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하기에 앞서서 이런 부분들을 육체로 경험하게 합니다. 영이기에 앞서서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육체로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미숙함을 볼 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판단하여 교정하거나 책망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서 그것을 목격하게 하는 까닭은 자신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은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함임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갈 6:1).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자들을 바로잡고”라는 조건을 둡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일들은 우선 자신을 교육하고 세우기 위함이며, 아울러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온유함을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경험 역시 그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경험에만 치중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이 특수하고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나 성숙할 때 깨닫게 됩니다. 독특한 영적 경험이란 자신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우선 이해해야 하며, 그 경험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한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천국을 경험했다고 해도 우선은 그 경험이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부족하고 그릇된 부분이 있음을 알 때 그 영적 경험은 의미가 있는 것이 되며, 또한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타인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며, 그 다음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경험을 할 때 이런 부분에 오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 경험에서 듣고 본 것이 모두 영적 실체일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이것도 가정의 한 유형인데 우리가 꿈을 꿀 때의 경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꿈은 얕은 잠이 든 상태이거나 깨어나기 직전에 꾸게 됩니다. 이 상태에는 우리의 의식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때로는 꿈 속에 우리의 생각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 생각마저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의 생각이 꿈에 섞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서 꿈을 꾸며 꿈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이 이런 저런 판단을 하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 경우와 같이 우리가 영적 경험을 할 때 그 속에 우리의 생각이 스며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예언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언은 식별되어야 하는 까닭이 이것인데, 우리의 생각이 예언 속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영이 우리의 생각을 통제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 우리의 의지가 스며들 여유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까닭에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증거들 속에는 우리의 의지가 포함되며, 천국 여행이라는 경험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보고 듣고 한 경험 속에는 자신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 포함됩니다. 천국 경험을 하게 되는 기능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설명하겠지만 독특한 영적 경험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 경험 전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많은 경우 독특한 영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는 대부분이 꿈과 환상인 것입니다. 꿈과 환상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시의 일반적 수단입니다. 에스겔이 천국을 본 것도 역시 환상이었으며, 요한 사도가 본 것 역시 환상이었습니다. 환상은 결코 실체가 아니며, 이미저리입니다. 그것은 비유이며, 알레고리이기 때문에 그 본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경험한 천국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이유도 이와 같은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는 섣부른 가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은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꿈과 환상은 그 영상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제시하고자 하는 뜻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그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까지 본 것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견자들은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까지 많은 세월동안 그 예언을 담아두는 훈련을 거쳤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영적 경험들을 합니다. 그 경험이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육체로 그와 유사한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성향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럴 경우 그 행위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경험하게 하는 것이지요. 세상일을 다양하게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성숙하게 되고 아울러 온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 경험을 먼저 거치고 그 경험들을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제대로 적용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신묘한 영적 경험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한 독특한 것들을 자신도 경험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은 자신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사람과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다르고 주어진 직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롬 12:3).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지를 먼저 점검합시다. 영적 경험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요,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함도 아니며, 우선은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여기에는 천국 여행이라는 경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울러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경험 속에는 우리의 의지가 포함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분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보고 듣고 한 모든 말이 다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그 모든 것이 실체이기를 원하며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숙할수록 그것은 환상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기까지 잠잠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경험은 주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경험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 경험이 자신에게 어떻게 유익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기까지는 타인에 대해서 침묵해야 하는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크고 비밀한 것들을 경험했지만 그 모든 것에 침묵하고 오로지 육체의 약한 것들만 자랑하려고 했습니다(고후 12:9).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신이 너무도 완고하고 변화하기를 싫어하는 결점 때문에 주어진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신묘한 경험을 했다면 우선 자신이 주님 앞에서 너무도 완악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장봉운 목사님 글에서 )
http://cafe.godpeople.com/healinghouse - 장봉운목사님카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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